어릴 적, 우리집은 꽤나 가난했다. 몹시 가난했다고 쓸까 고민했지만 비교적 가난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초등학교때 기억은 나주의 시골 같은 동네에서 살다가 아버지 사역을 따라 우리 가족은 섬에서 몇 년을 살았다.
너무나 작았던 섬. 육지로 나가려면 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은 꽤나 강렬하고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 지내다 엄마의 가출로 우리 가족 모두 엄마를 찾아 육지로 떠나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꽤나 상처를 입었고,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중학교 1학년 - 3학년
가정주부로 살던 엄마는 더 큰 육지로 나가 돈을 벌기 시작했고, 주말에 집에 내려왔다.
아버지의 사역은 계속 되었다. 나는 길게 배우지 않은 피아노로 교회에서 여전히 반주를 했다. 창피하기도 했고, 쉬고 싶기도 했던 양가 감정이 들던 일요일. 매 번 나에게 일요일은 교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교인들과 점심을 먹어야 하는 일과가 내 선택과는 상관없이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꽤나 공부를 열심히 했고, 심지어 좋아해서 작은 시골학교였지만 항상 1등을 유지했다. 좋아할만한게 공부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갈 수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버스를 타지 않고 아빠가 충분히 데려다줄만했을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우리 첫째 어린이집 등하원 하는 정도의 거리니깐) 항상 나를 버스에 태워 보내셨다. 버스 시간이 맞지 않는 날은 데리러 오라고 부탁하는게 너무 큰 일 인것 같아 걸어온 적도 꽤 많았다. 그때 왜 그렇게까지 부모를 배려했을까?
어느 비오던 날,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오던 길에 다 낡아서 덜렁거리던 운동화 밑 창이 그대로 쑥 빠져버렸다.
운동화를 사야한다고 내가 말하기보단, 부모가 먼저 가게에 들러 필요하지 않냐고 물어봐줄 수 없었을까?
그래도 원망 한 번 하지 않았던 착한 나였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아로 새겨진 청소년 기의 기억들은 내가 아이를 키우는 지금 문득문득 되살아난다.
그리고 부모를 향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한 번씩 일부러 이야기하곤 한다. 어릴때 왜 그렇게 가난하게 키웠어? 그게 최선이었냐고
결혼식때도 못도와줬으면 지금 나한테 폐 끼치고 살지는 말아야지! 라고 고함을 지른 적도 있다.
미안하냐고? 아니, 오히려 후련하다.
가정을 꾸리고 사는 지금은 오히려 너무나 풍족하고 차고 넘쳐서 물건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게 된다.
넓은 거실과 모든 편리한 것들이 가득한 집 안에서 좋은 향기가 나고, 커피를 내려 마실 수 있는 커피머신과 싱싱한 원두, 85인치 티비와 내가 좋아하는 블루투스 스피커는 곳 곳에. 세탁과 건조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최신형 세탁기와 매 번 물을 사먹지 않아도 되는 정수필터, 내 방에 셋업된 애플노트북과 듀얼모니터,최신형 핸드폰과 에어팟, 기분에 따라 바꿔 들 수 있는 명품 가방,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별 운동화, 캐시미어가 함유된 겨울 코트들. 이제 갓 돌 지난 아이에게 시간당 5만원인 몬테소리 센터를 보내주고, 계절마다 백화점에 가서 원하는 브랜드 착장으로 옷을 구입하고, 매일 등원할때 자기가 좋아하는 신발을 고를 수 있는 신발장이 있는 아이. 이 집과 공간은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더는 방에서 쥐가 나올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무서워서 숨거나 소리 지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겨울에 난방이 잘 안되어 추워서 목욕하는것도 싫고, 머리 감는것도 싫어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되살아 날 일은 없다.
냉장고 안을 열면 먹을 게 없어서 물만 가득하거나 어쩌다 계란이 있던 날, 냉장고를 열 때마다 실망했던 기억들
어린 시절, 내 생일에 제과점에서 산 생일케이크가 한 번도 없어서 속상해서 언젠가 한 번은 케이크를 사달라고 했었는데도
자라온 내내 희고 하얀 과일생크림 케이크를 생일 선물로 받아본 적이 없다. 그게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혔는지 작년에 만삭일때 내 생일에 과일생크림 케이크를 사서 부모님과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왜 한번도 사준 적이 없냐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물려서 하나를 다 먹지도 못하는 케이크를.. 어린 시절의 결핍이 살아가면서, 사는 내내 나를 낙인처럼 따라온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그러한 것들을 많이 극복해 나가고 있다.
오히려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육아를 도와주는 엄마가 우리 아이는 참 좋겠다, 엄마가 최고의 것만 주는구나 라고 감탄하신다.
엄마도 나를 키울때 왜 그러고 싶지 않았겠어, 가난한 시골교회 목사를 만나 결혼했으니 쌀 조차도 교인들에게 받아 먹던 처지였는걸
너무 곤궁하고 답답해서 돈 벌러 멀리 나간거고, 식당에서 설거지 하면서,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일하면서, 내 교육은 전혀 신경쓸 여력이 없어서 서운했지만 엄마는 엄마 대로 최선을 다한거지. 고생했어
그런데 난 이상하게 아버지가 용서가 잘 되지 않아,
그렇게 좋은 사람인 척,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감언이설로 나를 가스라이팅 했잖아.
내가 누릴 수 없는게 가난하게 지내야 하는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난 그렇게 사는게 창피했고, 내 안의 결핍은 전혀 지워지지 않아. 책 사달라는 말에도 도서관에 가라고 매몰차게 거절했잖아.
난 고등학교때 필요한 참고서도 내 힘으로 마련했어. 일주일에 만 원 용돈 받은걸로 산 게 전부인걸
알아, 고등학교 기성회비, 기숙사비, 식비 내느라 힘들어했다는것도, 수학과외 부탁할때도 죄인처럼 부탁했었잖아.
그때 난 알았던 것 같아. 내가 더 크게 성장하긴 힘들겠구나. 내 힘으로 난 어디까지 올라가볼 수 있을까? 이미 좌절했었던 것 같아.
우리 아이에겐 그러한 패배감을 절대 심어주지 않을거야. 그래서 열심히 살거야. 더욱 최선을 다할거야.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서 선택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하지 않을거야. 나도 하나님을 알고,믿지만 때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해. 우리가족 좀 잘 살 순 없었을까?
아웃백도 스무살 지나고 친구들이랑 처음 가봤어,
지금은 남편이 가자고 해도 가기 싫다고 하는데..
그래도 우리부모는 자식 복이 있나봐. 내가 집도 해줘서 신축아파트에 살고, 정수기, 안마의자, 티비, 쇼파, 필요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 육아 도와주는 명분으로 내가 다 해주잖아. 누리고 사셔. 받은 건 별로 없지만 내가 잘 살아서 당신들도 편안하게 사니 마음은 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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