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E는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
오랫만에 책을 읽었다. 시험보러 외국에 다녀온 직후, 한동안 실의에 빠져서 이번 생에 의미있는 일 같은건 1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원래도 '의미'따위랑 거리가 멀긴 했지만)
사람이 극심한 실의에 빠지면 우울증을 동반하는 것도 같다. 17살때 먹었던 정신과치료제가 다시 한 번 필요한 밤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은 기억에서 지우기로 한다. 더이상 무언가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때론 남자가, 술이, 정신과치료가 필요하기도 하다. 다시 불안한 한국에서의 생활들의 시작선상에 서있으려니 다리가 후들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모든 것을 다시금 놓아버리고 싶었다. 잡코리아에 올라오는 일자리는 무척이나 시시해보이는 것들뿐이었다. 내가 한때 희망했던 대기업같은 곳은 내 실력으로는 '꿈'만 꿀 수 있는 곳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점점 더 명확하게 알아가는 시점에서 일자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전락해버렸을 뿐이다. 그 생각을 하니 김엄지의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라는 책을 읽고 싶어졌다.
주인공 E는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평범한 직장인, 그는 가끔 만나서 섹스를 하는 여자가 있다. 여자친구는 아니다. 주말엔 가끔, 상사의 권유로 [권유라고 쓰고 강제라고 읽는] 낚시에 불려가기도 한다. 퇴근 후에는 직장동료 a,b,c,d와 술을 마시며 신변잡기식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E는 무척이나 평범한 나날들을 보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출근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퇴근을 반복하면서
E는 출근전, 퇴근후 자신의 발목을 돌린다. 발목이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가 가끔 만나서 같이 잤던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합석한 후 모텔로 향했던 그 여자는 등을 바라보며 잤다.
무심하게 등을 보여주었던 그 여자와의 만남도 이어지진 않는다. 항상 점심식사 후 커피를 샀던, '조'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표를 주었던 A는 갑자기 사라졌고 그는 몇 달이고 돌아오지 않는다.
종종 함께 하던 여자도, 동료도 사라졌지만 E는 별다를 것 없이 평소처럼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가끔은 산책을 하기도 한다.
"E의 얼굴과 어깨에 쉬지 않고 비가 떨어졌다.
널지 않은 빨래가 떠오르자 조가 정말 개새끼처럼 느껴졌다.
그는 맥주를 마시면서 걸었다.
그는 느리게 걸으면서 조 이 개새끼라는 혼잣말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조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E는 문득 조에 대해서 너무 많이 중얼거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깨닫지 않아도 되는 것을 꺠달아 버린 E는 불편해졌다.
나이가 들고 있군. E는 그렇게 생각했다. "
E는 올해 봄부터 나이가 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봄부터 망설임이 늘었다. 사소한 고민에 빠졌고,
별것 아닌 일에 쉽게 화가 났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시로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만한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과 별개로 E는 자주 포기하고 싶었다. 울적했고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 E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고 싶다고 자주, 몇번이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말을 꺼내고 나면, 아, 내가 포기할 것이 있었던가? 혼자 곱씹어보게 된다.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잃어온 것 같은 나날들이어서 더이상 잃을 게 없다는 식의 생각은 한 편으론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는 E처럼 자주 식은땀이 났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심지어 먹고싶지도 않아서 식욕에 대해서 화가나곤 한다.
먹는것도 귀찮다. 치우는 것도 배설하는 것도 그 모든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모든 행위들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한 나는, E와 다른 점이 있다면 E처럼 매일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d처럼 하하, 허허를 반복하며 사람 열받게 하는 동료는 없다는 점이 차이점일게다. 그런 보잘것 없는 나날들의 연속성을 채우기라도 하듯 까만 선에 점처럼 하루를 채워가던 E에게 하나의 사건이 생기면서 그는 5일간의 휴가를 받고 섬에 간다. 섬에 간 E는 "자살여행자"가 아니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나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 섬에 왔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섬에서 돌아온 E는 출근, 출근, 출근을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 출근길
"출근길에 E는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 결심하고 나자 곧 뿌듯해졌다"
A는 어디로 갔을까,
E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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