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세계를 헤매고 있는 나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단어들을 조립하고 문장을 만들고 싶어 말과 글이라는 거대한 세계 속을 계속 뒤적뒤적 헤매고 있었어. 누적의 합을 만들기 위해서. 무의식 속에서 건져 올린 하나의 단어. 단어와 단어의 조합. 그것은 하나의 문장으로 직결될 수 있을까? 이쪽의 세계도 나, 저쪽의 세계도 나. 어떤 모습이라도 퍼즐처럼 조각조각 이어붙이면 그게 나다. 부정할 수 없는, 부정하고 싶은 역겨운 모습의 나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착한 미소를 움켜쥔채 서있는 나도 나의 한 부분이고. 사람들은 균형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로 통합하고 싶다. 이곳과 저곳의 내가 분리되어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완전체처럼 하나의 모습을 가진채 있을 수는 없는걸까?
다행이다 폴오스터의 문장에서 동질감을 느꼈다.
폴오스터는 ‘빵굽는타자기’에서 이와 같은 말을 했다. 나는 대범하면서도 소심하고, 재빠르면서도 굼뜨고, 순진하면서도 충동적이었다.
말하자면 모순이라는 정령에게 바쳐진 걸어다니는 기념비, 살아 숨쉬는 기념비였다.
빵 굽는 타자기-폴 오스터(젊은 날 닥치는대로 글쓰기)
의사나 정치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것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칸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각오도 되어 있었으니까 불만은 없었다. 내가 원한 것은 재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 그것뿐이었다.
나와 함께 공부한 문학 청년들은 모두 장래에 대해 분별있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부모님의 주머니에 기댈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평생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할 터였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처지였고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설명할 수가 없다. 친구들은 그렇게 분별있게 행동했는데, 왜 나는 그렇게 무모했던 것일까?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가망이 없는 열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상대가 되기에는 너무 젊었고, 내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기에는 너무 수줍었다.
그 고독한 시간 속에서 나는 어둠 속을 들여다보고, 난생 처음으로 나 자신을 본 것 같다.
내가 상상한 미래생활은 기껏해야 한계 생존- 일상 세계의 변두리에서 빵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가난한 시인의 생활- 이었다.
대학에 다닌 지난 2년 동안, 나는 많은 책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도 많이 보러 다녔다. 세일리아 극장은 날마다 다른 영화를 두 편 동시 상영으로 틀어 주었고 학생한테는 입장료를 50센트밖에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강의실에서 보낸 시간 못지않게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래도 나는 상당히 많은 글을 썼다. 노력에 비해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장편소설 두 편에 착수했다가 포기했고 여러 편의 희곡을 썼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고 시도 계속 썼지만 결과는 대개 실망스러웠다. 야망은 컸지만 능력이 따르지 못했다. 그래서 걸핏하면 좌절감에 빠졌고 인생의 낙오자라는 생각이 늘상 따라다녔다. 그래도 완전히 낙담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나는 계속 글을 썼고 컬럼비아 데일리 스펙테이터 지에 서평과 영화평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기사는 제법 자주 실렸다.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빠르게 전진하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나는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두 발을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내딛고 있었지만 아직은 달리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내가 <에소 플로렌스>호에서 보낸 몇 달은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바다에 떠 있을 때는 시간이 육지와는 다른 식으로 흘러간다. 거기서 엮은 일이 대부분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래서 나는 잠시도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내 인생의 비교적 짧은 기간 속에 놀랄 만큼 많은 인상과 기억을 쑤셔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배를 타고 떠나는 것으로 내가 무엇을 증명하고 싶어했는지 지금도 잘 알 수가 없다. 아마 어딘가에 안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내가 그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서도 내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때의 자기성찰과 자유를 되찾을수만 있다면 쭈그리고 앉아서 글을 쓰기에는 가장 좋은 상태가 될 것 같았다.
날마다 너무나 많은 양을 번역해야 했고 일할 마음이 내키든 말든 날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정해진 작업량을 처리했다. 차라리 프라이팬에서 햄버거를 뒤집는 편이 더 수지맞는 일이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우리는 자유로웠다. 아니 적어도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나는 직장을 때려치운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좋은 나쁘든 이것이 내가 선택한 생활 방식이었다. 돈벌이를 위해 번역을 하고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느라 그 몇 년 동안은 책상 앞을 떠난 순간이 거의 없었다. 거의 온종일 종이에 낱말을 적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더 이상 일확천금을 꿈꾸지 않았다. 하루하루 성실히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 생존의 기회를 얻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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